사타케 요시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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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타케 요시미네는 데와 이와사키 번 초대 번주 사타케 요시나가의 차남으로, 1715년 사타케 요시타다의 양자가 되어 다이묘가 되었다. 그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추구하며 검약령을 폐지하여 번 재정을 악화시켰으며, 남성 상속자를 얻지 못해 여러 후계자 문제에 시달렸다. 결국, 사타케 요시마사의 아들 사타케 요시자네를 양자로 삼았으며, 1749년 6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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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타케 요시미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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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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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사타케 요시미네 |
일본어 이름 | 佐竹義峯 |
출생 | 1690년 10월 14일 |
사망 | 1749년 9월 21일 |
아버지 | 사타케 요시나가 |
어머니 | 마쓰라 시게노부의 양녀, 세이소인 |
양아버지 | 사타케 요시카쿠 |
배우자 | 구로다 나가키요의 딸, 도시히메 |
관직 | |
관위 | 종4위하 시종, 우쿄다이부, 좌근위소장 |
주군 | 도쿠가와 이에쓰구 → 도쿠가와 요시무네 → 도쿠가와 이에시게 |
번 | 데와 구보타번 번주 |
기타 정보 | |
시대 | 에도 시대 중기 |
유년명 | 센주마루, 구마 |
개명 | 요시야스, 요시미네 |
계명 | 엔묘인 게츠오 지신 |
묘소 | 아키타현아키타시 이즈미 미타케네의 텐토쿠지 |
씨족 | 사타케 씨 |
형제 | 요시미네, 곤 등 |
자녀 | 아키라, 토미, 나오, 히사시 |
양자 | 요시카타, 요시마사 |
구보타 번 다이묘 | |
역대 | 제5대 구보타 번 다이묘 |
재임 기간 | 1715년 - 1749년 |
쇼군 | 도쿠가와 이에쓰나, 도쿠가와 요시무네, 도쿠가와 이에시게 |
이전 | 사타케 요시타다 |
이후 | 사타케 요시마사 |
2. 생애
사타케 요시미네는 에도 시대 중기의 다이묘로, 데와 구보타번의 5대 번주이다. 그는 이와사키번 초대 번주 사타케 요시나가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처음 이름은 義恭|요시유키일본어였다.
1715년, 후사 없이 사망한 선대 번주 사타케 요시타다의 말기 양자로 입적되어 구보타번의 가독을 상속받았다. 번주가 된 후에는 선대와 달리 사치를 추구하고 검약령을 폐지하여 번의 재정을 크게 악화시켰다. 1748년에는 흉작으로 재정이 파탄 직전에 이르렀다.
그는 아들이 없어 후계자 선정에 어려움을 겪었다. 여러 과정을 거쳐 일족인 사타케 요시카타를 양자로 삼았으나 요시카타가 1742년에 먼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요시자네를 다시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정했다.[1]
1749년 8월 10일, 60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양자인 요시자네가 번주 자리를 계승했다.
2. 1. 출생과 가독 상속
사타케 요시미네는 데와 이와사키번 초대 번주 사타케 요시나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히라도번 번주 마쓰라 시게노부의 양녀인 세이소인이다. 아명은 센주마루(千寿丸), 구마(久馬)였으며, 처음 이름은 '''義恭|요시유키일본어'''였다.겐로쿠 15년(1702년) 10월 15일,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를 알현(오메미에)했다. 쇼토쿠 5년(1715년) 9월 12일, 선대 번주 사타케 요시노리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그의 말기 양자가 되어 구보타번의 가독을 상속받았다. 요시미네는 요시노리의 사촌 형이었으며, 나이도 요시노리보다 많았다. 같은 해 9월 28일, 7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구를 알현하여 번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같은 해 12월 18일, 종4위하 시종 겸 우쿄노다이부(右京大夫)에 서임되었다. 교호 2년(1717년) 4월 15일, 처음으로 영지 방문(오쿠니이리)을 허가받았다. 엔쿄 원년(1744년) 12월 16일, 좌소장에 임관되었다.[1]
2. 2. 번주 시절
1715년(쇼토쿠 5년) 9월 12일, 선대 번주 사타케 요시타다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그의 말기 양자가 되어 구보타 번주 자리를 계승했다. 요시미네는 요시타다의 사촌 형이었으며, 나이도 더 많았다. 같은 해 9월 28일, 7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구를 알현하여 번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12월 18일에는 종4위하 시종 우쿄노다이부에 서임되었다.1717년(교호 2년) 4월 15일, 처음으로 영지인 구보타 번에 들어가는 것을 허가받았다. 1744년(엔교 원년) 12월 16일에는 좌소장으로 관위가 올랐다.
선대 번주 요시타다와는 달리 사치를 좋아하여 검약령을 폐지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추구했다. 이로 인해 번의 재정은 크게 악화되었고, 가신들의 지행(봉록)을 빌려 겨우 재정을 유지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특히 1748년(간엔 원년)에는 큰 흉작이 들어 번의 재정은 파탄 직전에 몰렸다.
요시미네는 후쿠오카 번의 분가 출신인 구로다 나가키요의 딸과 결혼하고 여러 측실을 두었으나, 아들을 얻지 못했다. 처음에는 일족인 이와사키 번의 사타케 요시아키를 양자로 삼으려 했지만, 가신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구보타 신덴 번의 사타케 요시카타를 양자로 맞이했다. 그러나 요시카타가 1742년에 먼저 사망하자, 다시 후계자를 정해야 했고 요시카타의 아들인 사타케 요시마사를 양자로 삼았다.[1]
1749년(간엔 2년) 8월 10일, 6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양자인 요시마사가 그의 뒤를 이었다.
2. 3. 후계 문제
요시미네는 후쿠오카번의 방계 가문 출신인 구로다 나가키요의 딸과 결혼했고, 최소 두 명의 측실을 두어 네 명의 딸을 낳았지만 아들은 없었다.[1] 이로 인해 후계자 문제가 발생했다.처음에는 일족인 이와사키번의 사타케 요시아키를 양자로 삼으려 했으나, 가신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1] 결국 같은 일족이자 구보타 신덴번의 사타케 요시카타를 대신 양자로 맞이했다.[1]
그러나 1742년 사타케 요시카타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요시미네는 다시 후계자를 정해야 했다.[1] 이에 요시카타의 아들인 사타케 요시마사를 새로운 양자로 삼았다.[1] 1749년 요시미네가 사망하자, 양자 사타케 요시마사가 뒤를 이었다.
2. 4. 사망
간엔 원년(1748년)에는 흉작이 일어나 번 재정이 파탄 직전에 이르렀다. 결국 간엔 2년(1749년) 8월 10일, 6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그는 생전에 후계자를 얻지 못해 일족인 사타케 요시카타를 양자로 삼았으나, 요시카타가 1742년에 먼저 사망했다.[1] 이에 요시카타의 장남인 요시자네를 다시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정했고, 요시미네 사후 요시자네가 뒤를 이었다.
법호는 円明院月光智心|엔메이인 겟코 지신일본어이며, 묘소는 아키타현 아키타시 이즈미 미타케네에 위치한 텐토쿠지이다.
3. 일화
사타케 요시미네(혹은 요시카즈의 일화라고도 한다)는 에도에서, 우산 대용으로도 쓸 수 있을 만큼 큰 아키타부키를 자랑했는데, 다른 다이묘들에게 믿어지지 않았다. 영민들은 산야를 수색하여 2개의 거대한 부키를 발견했다. 그것을 에도로 옮겨, 번저에서 다른 다이묘들에게 보여주어 명예를 회복했다고 한다. 이 후, 거대한 아키타 부키의 존재가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바바 분코가 아키타 소동을 그린 『아키타 삼나무 직설 이야기』에 사타케 요시미네의 일화로 실려 있는 일화이다. 바바 분코는 호레키 8년 12월 29일(1759년 1월 27일)에 처형되었으므로, 사타케 요시카즈의 일화로 보기에는 모순이 발생한다. 또한, 야마모토 슈고로의 소설 『부키 문답』(1940년)에서는, 요시카즈의 아버지인 사타케 요시아쓰의 에피소드로 묘사되어 있다.
4. 가계
- '''아버지''': 사타케 요시나가 (1655-1741)
- '''어머니''': 세이소인 - 마츠우라 시게노부의 양녀, 마츠우라 노부타다의 딸
- '''양아버지''': 사타케 요시타다 (1695-1715) (1695-1715)
- '''정실''': 리히메, 엔소인 (1702-1745) - 구로다 나가키요의 딸
- '''측실''': 호노, 간코인 (1698-1734) - 야스다 씨
- * 장녀: 테루 (렌쥬인) (1720-1786) - 마츠다이라 사다타카 정실
- * 차녀: 토미 (교쿠호인) (1722-1744) - 토다 미츠오 정실
- * 삼녀: 화안청공동녀 (1724-1724) - 요절
- * 사녀: 나오 (코겐인) (1729-1748) - 사타케 요시아키 정실
- * 장남: 센쥬마루 (1731-1732) - 요절
- * 오녀: 쥬 (혼세이인) (1734-1798) - 마츠우라 구니 정실
- '''측실''': 이요, 신료인 (?-1735) - 나가타 씨
- * 차남: 양산순광동자 (1735-1735) - 요절
- '''양자'''
- * 사타케 요시카타 (쿠보타 신덴 번주) (1692-1742)[1]
- * 사타케 요시마사 (1728-1753) (1728-1753) - 사타케 요시카타의 장남[1]
5. 가신
- 시부에 미네미쓰
- 다테 미네무네
- 다카야 미네쓰네
- 다카야 미네가 (도무라 요시미의 차남으로 미네쓰네의 양자)
- 다카야 미네아키 (도무라 요시미의 삼남으로 미네쓰네의 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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